[글=시니어신문 발행인 장한형]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다. 진심으로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유가족에 깊은 위로를 전한다. 다만, 대부분의 언론에는 유감이다. 가해 운전자가 70대라는 소식이 들렸을 때, 또 나이 탓 하겠다 했다. 이번 사고 가해 운전자가 60대 후반 고령이니, 싸잡아 나이든 운전자들은 운전 못 하게 해야 한다는 말투다. 서울시장도 거든다. 20대라도 운전 서툴면, 30~40년 운전으로 가족 먹여 살린 60대보다 사고위험이 높다. 하물며, 어찌 나이 탓인가.
UN은 한 나라 전체 인구 5명 중 1명 이상이 65세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초고령사회가 된 나라들은 노인인구집단을 ‘사회문제’로 의제에 올린다. 우리나라 정부도 고령화 관련 정책을 낼 때마다 ‘인구절벽’, ‘인구지진’, ‘지역소멸’과 같은 자극적이고 절망적인 용어를 서슴없이 꺼낸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일본에서는 한 사람이 ‘하류(下流)노인’이란 개념으로 ‘대박’을 냈다. 2015년의 일이다. 그의 신조어 하류노인은 노인정책 관련 일본베끼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에 신속하게 전파됐다. 독자의 공포심에 기생하는 언론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우리나라에도 하류노인의 시대가 온다”며 대서특필했다. 보험사들과 연계된 한 단체는 신조어를 만든 그를 국내로 초청해 ‘토크콘서트’까지 열었다. 결론은 어이없게도 보험가입.
이 모든 부산한 행위들의 근본에는 노인에 대한 전근대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일은 못하는데 부양해야 할 노인인구가 많으니 큰일 났다’는 식이다. 그리고, 매우 단선적인 등식으로 귀결된다.
노인인구=부양인구=청년부담=세금인상=경제위기=국가위기
실제로, 이 등식에 삽입된 키워드들은 현재 논의되는 고령화 정책의 골격이다. 노인이 늘어나면 나라가 위태롭다, 그렇다 치자. 대안은 있는가.
우리나라 노인부양정책의 대표주자는 기초연금제도다.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소득하위 70%에 포함되면 매달 30여만 원을 지급한다.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의 노후생활을 지원한다는 취지다. 기초연금 예산만 십 수조 원이다.
기초연금을 비롯해 노인일자리사업,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전체 노인복지예산은 약 20조에 달한다. 누가 주든 이 예산의 원천은 일하는 사람들이 낸 세금이다.
알기 쉽게 따져보자. 2019년 기준 임금근로자 평균연봉은 3700만 원, 산술적으로 올해 노인복지예산 18조8000억 원은 50만8000명의 연봉과 같은 액수다. 전체 임금근로자가 2055만 명이니, 월급쟁이 10명 중 4명의 1년 치 몫이다.
설상가상, 이른바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생)의 고령화로 해마다 노인인구는 20만~40만 명씩 늘어난다. 그런데, 통계청 장래인구추계를 보면,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17년 3757만명을 정점으로 계속 감소해 2067년 1784만 명까지 절반 이하로 쪼그라든다. 이 같은 추세라면 대략 월급쟁이 10명 중 8명 몫이 노인복지예산으로 떨어져 나간다. 나라가 없어질 만도 하다. 이것이 노인을 문제로 인식하는 한국사회 셈법이다.
분명 이분법이다. 기준은 65세. 칼로 무 베듯, 그 이하는 생산가능연령, 그 이상은 부양대상이다. 생산가능연령이 노인을 부양하는 매우 기계적이고 단편적인 구조. 아무리 건강하고 일할 의욕이 넘쳐도 65세가 되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부양대상으로 잘려나간다. 그리고 문제 그룹의 일원이 된다. 심지어 55세 이상이면 고령자, 그래서 60세가 되면 직장에서 나가라고 법으로 못 박았다. 그리고 65세부터 무 절일 때 소금 뿌리듯 세금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문제’가 썩으면 안 되니까. 즉, 64세까지는 일하고 세금 내는 사람, 65세부터는 ‘사람’이 아니라 ‘늙어 썩어 없어지는’ 노인이다.
이 이분법적 구조는 상당히 견고하다. 우리나라 노인복지 현장을 대표하는 경로당과 노인복지관, 두 곳 모두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다. 역시 부양대상이다. 이곳을 이용할 수 있는 (64세 이하 ‘사람’이 아닌) ‘노인’의 나이는 노인복지관 60세 이상, 경로당 65세 이상으로 분류돼 있다.
법적으로는 ‘노인여가복지시설’이란 아름다운 명칭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얄밉게 해석하면 65세 언저리에 도달해 노동시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떠안아 소일거리를 제공하는 공식적인 피난처에 불과하다. 즐길거리도 빈약하다. 오죽하면 또 돈을 들여 ‘경로당 활성화 사업’을 해야 할까. 받아들이기 불편한 현실이다.
65세 기준, 생산과 부양의 대상으로 국민을 나누는 이분법적 셈법은 심각한 세대갈등을 일으킨다. 최근 이슈로 떠오르는 일자리 세대갈등이 그 정점에 있다. 생계를 위해 경제활동에 나서는 고령자들이 급증하면서 청년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쟁이다. 50대 중반부터 연차적으로 임금을 줄이고 대신 정년을 늘리는 임금피크제마저 청년고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임금단체협약에서 벌어진 정년연장 논란이 대표적이다. 현대차 노조 측은 60세 정년을 65세로 늘려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지만, 사내 MZ세대(1980~2000년생) 직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없던 일이 됐다.
근본적으로 노년세대와 청년세대에 적합한 일의 종류가 달라 일자리 세대갈등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노년세대가 노동시장에 머무는 기간이 길수록 필연적으로 청년세대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이다.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국민연금에도 세대갈등이 내재한다. 젊은세대는 내가 낸 연금보험료가 당장 노년세대에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월급의 9%를 꼬박꼬박 연금보험료로 납부하고도 정작 나의 노후에 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는 노년세대다. 가뜩이나 저출생 고령화로 청년세대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연금으로 인한 세대갈등은 곧 폭발해도 이상치 않은 시한폭탄이다.
숨겨진 갈등요인은 또 있다. 아파트로 상징되는 부동산이다. 최근 미친 듯이 오르는 아파트값을 바라보는 청년세대는 집 한 채 없는 형편이 불안하고, 재테크에서 멀어질까 초조하다. 그래서 ‘영끌’해서라도 집을 사려 한다. 그런데 집주인 대부분은 50~60대 이상 노년세대다. 젊은세대의 소득 상당 부분이 집을 매개로 노년세대로 이전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젊은세대 위에서 군림하고 가르치려는 노년세대는 ‘꼰대’로 전락한다. 말끝마다 “나 때는 말이야~”를 강조하는 노년세대를 두고, 젊은세대는 ‘라떼 이즈 홀스’(Latte is Horse)라는 기막힌 풍자를 만들어 냈다. ‘지공’(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 ‘노틀’(늙은 남자), ‘틀딱’(틀니를 한 노인)과 같은 비속어를 쓰면서 키득거린다. ‘나이가 들면 병약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부정적 인식이 확대재생산되는 사회구조. 이를 방치하면서 젊은세대의 피해의식만 탓할 수 있겠는가.
전문가들은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고 입을 모은다. 나이 들어서도 일과 소득을 갖게 되면 자립생활이 가능하다. 당사자들도 열렬히 일을 원한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73세까지 일해야 하는 현실도 무시 못 한다. 하지만, 꼭두새벽 길거리 쓰레기 줍고 이십몇만 원 받는 세금 일자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기초연금까지 합쳐도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현실, 이마저도 길게 줄 서 기다리는 현실이니 슬프다.
게다가, 65세 이상은 부양대상이니, 이들의 일자리 정책은 고용노동부가 아니라 보건복지부가 맡아야 하는 행정도 어처구니 없다. 65세 이상 ‘노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복지시혜의 대상이다. 사람이 아니므로, 노동권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무기력한 수혜자일 뿐이다. 국가가 합법적으로 나이든 국민의 권리와 자존감을 짓밟고 깔아뭉갠다. 나이 먹는 게 재난인 사회. 당사자들조차 입을 꾹 닫고 있다.
이분법적 구분을 없애야 한다. 1950년대 UN이 만든 65세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 소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일하고 싶은 사람과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 동거가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정책과 사안마다 기준을 달리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정책대상자를 선별해야 한다. 국민 개개인의 병원진료, 금융정보까지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는 시스템을 갖추고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면 직무유기다.
그리고, 당사자들의 인식변화다. 필란드 로푸키리(Loppukiri). 지난 2000년, 친구였던 할머니 4명이 다른 데 손 벌리지 말고 서로 도와가며 활동적으로 외롭지 않게 살아보자며 만든 공동주거단지다. 지금은 평균 70세 가량의 입주자 50~80명이 함께 살고 있다. 철칙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자급자족하는 것. 핀란드 정부와 헬싱키시도 값싼 부지를 제공하며 거들면서 제2, 제3의 로푸키리가 생겼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는 초고령사회, 로푸키리는 당사자들의 자립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나이 탓하며 주저앉는 ‘진짜 노인’은 갈 곳이 요양원밖에 없다.
[시니어신문 장한형 대표]
2005년부터 시니어 전문기자,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시니어신문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KBS라디오 ‘출발멋진인생’에서 19년째, 매주 월요일 주요 시니어 이슈를 풀어 설명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지역시니어신문을 발행, 많은 시니어들께 명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