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호수공원 둘러 싼 역사와 추억

울산시는 2007년 1월 30일 선암호수공원 조성을 마무리했다. 그 이전인 1964년,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비상 용수 공급을 위한 공업용수댐으로 선암저수지가 조성됐다. 40여년 만에 저수지에서 호수공원으로 탈바꿈한 것. 울산시민들에게 점차 잊혀지고 있는 저수지 유래, 옛 지명을 더듬어 본다.

■ 선암제 유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농업용으로 축조한 ‘선암제’라는 못이었으나, 공업단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64년 12월 새로이 축조했다. 이후 지속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해 현재 총 저수량 200만㎥, 유효 수량 150만㎥, 유효면적 1.2에 이르고, 수몰면적 0.27㎢, 댐 높이 22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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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호수 공원 지도. 사진=손학수

■ 마을

주차장 뒷쪽 끝바우마을. 신선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화암이라고도 한다. 뾰족한 바위를 뜻하는 지명이다. 14가구가 살았는데, 지금도 몇 가구가 남아 있다. 사진=손학수

대나리

함월산 북쪽 기슭에서 두왕로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1960년대 20여 가구가 살았으며, 주민들은 농사로 생활했다. 이곳의 논들은 수리시설이 없는 천수답이었으나, 가뭄을 타지 않는 기름진 땅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큰 나루터가 있어 ‘대나루’라고 부르다가 ‘대나리’로 바뀌었으며, 일명 ‘대날’로 압축됐다가 한자로 ‘대일’이 됐다고 한다. 1973년 2월 24일 카프로락탐 사택이 건립되면서 마을 진입로가 확장되고 1973년 쯤 전기가 들어왔다. 이후 1970년대 후반 풍산금속 사택이 입주했고, 1987년 9월 남영아파트가 준공된 이후 많은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큰 마을로 발전했다.

새터는 현재 선암저수지 둑 쌩바우 쪽에서 5분의 1 지점이다. 사진=손학수

새터

선암저수지 둑을 쌓은 곳에 있었던 마을이다. 현재 이곳의 마을은 선암저수지를 조성할 때 일부 주민들은 이주민이 돼 정든 땅을 떠나야 했다.

명동

현재 새터 남쪽에 있는 마을로, 흔히 야음심씨라고 부르는 청송심씨 집성촌이었다. 그 외 밀양박씨 등 20여 세대가 살았다. 울산시가지를 통과하는 동해남부선 철로를 이설할 때 우회하는 철로가 이 마을을 통과하게 됐고, 5~6가구가 철로 부지에 편입돼 이주했다.

■ 골짜기

골새·새골 옛 지명. 사진=손학수

골새·새골

선암동 453번지 일대에 있는 골짜기로 보탑사의 서남쪽에 해당한다. 이곳은 귀배기 고개아래에 있었으며, 선암에서 수암으로 가는 골짜기다. 현재 이곳 남쪽 부분은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옛 지형이 남아 있다.

허재비 박골 옛지명. 사진=손학수

허재비 박골

선암동 656번지 일대에 있는 골짜기로, 끝바우마을에서 대나리마을로 가는 중간 쯤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곳을 말한다. 이곳은 인가가 없는 한적한 곳이기 때문에 오가는 취객들에게 허상이 보여 혼비백산해 실신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길옆에 있는 옹달샘에 빠져 허둥댔던 일화도 전해지는 곳이다. 이곳에 여러 채의 주택이 있다. 현재 이곳은 옛 지형이 남아 있다.

구북이골

소똥비알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끝바우에서 수암으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다. 한자어로 ‘구복곡’이라 하며, 개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하여 일컫는 지명이다.

팔밭골 옛지명. 사진=손학수

팔밭골

선암저수지 북쪽에 있었던 골짜기로, 선암호수공원 물레방아와 연꽃이 조성된 곳이다. 한자어로 ‘팔전곡’이라 하며, 현재 이곳은 선암저수에 수몰되고 극히 일부 지형만 남아 있다.

막골 옛지명. 사진=손학수

막골

선암저수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사람이 사는 움막이 있었다고 해 일컫는 지명으로, 막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를 아랫막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를 위막골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은 옛 지형이 남아 있디.

사당골

선암에서 상개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당고개’라 하는데, 그곳의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고 해 일컫는 지명이다.

■ 들

멀낭들                                                                                                                         끝바우마을에서 대나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남고개’라 하고, 그 고개 좌우에 있는 들을 일컫는다. ‘조선지지자료'(朝應地誌資料,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 지명과 지지(地誌) 사항을 조사해 작성한 지리정보 자료)에 언문으로 ‘멀랑들’로 기록돼 있다. 현재 이곳은 옛 지형이 남아 있다.

바위

신선바우 상부. 사진=손학수

신선암

선암동 뒷산을 ‘신선산’이라 하고, 그 산 정상에 있는 바위가 ‘신선암’이라 전해오는데, 요즘은 ‘신선바위’로 더 알려져 있다. 이 바위에 오르면 울산의 사방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바위 모양이 좋은 곳이기에 옛날 신선들이 종종 구름을 타고 이곳에 내려와 놀았다고 해 신선암이라고 한다. 북쪽 절벽 아래에는 보현사가 위치해 지금도 신선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쌩바우(생바우) 옛지명. 사진=손학수

쌩바우(생바우)

신선바위 동쪽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바위였으며,타포니(암석측변에 형성되는 풍화혈)현상을 지니고 있다.

끝바우 옛지명. 사진=손학수

끝바우

신선바위 서쪽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바위였으며, 지금은 울창한 소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뾰족한 바위로 형성돼 있다.

■ 고개

극락고개 옛지명. 사진=손학수

극락고개

선암마을에서 극락못으로 가는 고개로, 선암마을의 관문이었다. 지금의 야음초등학교 쪽 호수공원입구에 해당된다.

끝바위 고개 옛지명. 사진=손학수

끝바우 고개

예전 이곳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조성돼 있어 노란탱자가 유명했고, 여우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손학수 기자 단상

선암호수공원의 옛지명을 살펴보니 정겹고,구수한 사투리가 흠뻑 묻어나는 느낌이다. 우리들에게 어린시절 동심으로 돌아가 짙은 향수를 불러오게 한다. 심씨들의 집성촌도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하늘 위에 퍼져가는 흰 종소리처럼 여운만 남는다. 그대들의 희생과 선암저수지 둘레길을 조성한 울산시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로 인해 울산시민들의 건강으로 ‘밝은 울산, 건강한 울산, 발전하는 울산’이 되지 않을까.

손학수 기자
손학수 기자
세월은 어느덧 흘러 70평생을 살아 왔구려??? 늦깍기 대학을 졸업 했구요. 전공과는 달리 기술계통으로 취업,정년하고 나니. 갈 곳은 많으나 오라는 데는 없어, 번민과 고뇌로 전전 긍긍 하던 중 시니어 기자를 지원 했구려. 젏음의 열정은 식었으나 긍지와 자부는 남아 열공 해 볼까 합니다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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